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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계약서 번역 시 주의할 점 – AI도 종종 하는 치명적인 실수

 

간단한 계약서 영한 번역 감수를 마쳤는데요, 전체적으로 번역이 잘 되었지만 법률적으로 유의미하게 문제되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번역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주의하지 않으면 다툼과 분쟁을 일으킬 수 있어 신경써야 할 부분이었죠. 비단 해당 건 번역사뿐만 아니라 AI에게 번역을 시켜보아도 틀리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다른 번역사님들과 더불어 고객님들에게도 주의를 환기시켜드리고자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예시로 살펴보겠습니다.

 


예시 1

 

영문

The 30 percent of total amount shall be paid within 7 days of receipt of order and the balance of amount shall be paid before shipment.

번역문

총 계약금액의 100분의 30은 주문 접수일로부터 7일 이내에 지급하여야 하며, 잔금은 선적 전에 지급하여야 한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receipt of order입니다. receipt는 수령, 영수, 인수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경우에 따라 접수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보통 ‘수령’과 ‘접수’는 거의 동시에 일어나지만 법률적 측면에서는 다른 개념입니다. ‘수령’은 주문서가 상대방에게 도착한 상태로서, 상대방이 단순히 주문서를 받기만 하면 인정되며 영어로는 Receipt라고 표현합니다. ‘접수’는 상대방이 받은 주문 내용을 확인하고 그 주문을 승인한 상태를 의미하고 영어로는 Acceptance라고 표현합니다.

 

위 영문 예시에서는 구매자가 공급자에게 대금을 지급하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공급자 입장이라면 ‘수령’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돈을 더 빨리 받을 수 있어서 유리하겠지만, 만약 자신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경우인데 ‘접수’라고 번역하면 차일피일 의무 이행을 늦출 수 있는 빌미가 생기게 됩니다. ‘아니, 계약서에서 접수라고 하지 않았냐. 수령은 했지만 아직 접수되진 않았다’라며 우길 수 있는 꼬투리를 주게 되는 것이지요.

 

해당 영문을 AI들에게 번역하라고 시켜보았습니다.

클로드: 총 금액의 30%는 주문 접수 후 7일 이내에 지급되어야 하며, 잔액은 선적 전에 지급되어야 합니다. 

-> 접수? 맘에 들지 않습니다.

챗지피티: 총 계약금액의 30%는 주문서를 수령한 날로부터 7일 이내에 지급하고, 잔금은 선적 전에 지급한다. 

-> 오~ 굳~

제미니: 총 대금의 30%는 주문서 수령 후 7일 이내에 지불하며, 나머지 잔금은 발송 전에 완납하여야 한다. 

-> 완납? 그렇게 못 볼 바는 아니나 원문에서는 그냥 지급이라고 했는데 급발진. 괜히 헛멋 부리는 것 같아서 맘에 들지 않음.

웬일로 챗지피티가 깔끔하게 번역을 잘했네요. 계약서 번역은 챗지피티가 제일 제멋대로였는데.

 

제미니가 Before shipment를 발송 전이라고 번역했는데, ‘선적 전’을 ‘발송 전’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원래 이건 위험의 이전에 관한 것이긴 하지만, 배에 싣기만 하면 상대방에게 도달하지 않아도 효력이 생긴다고 보는 ‘발신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여지도 있기 때문입니다. receipt of order는 그런 측면에서 (즉, 의사표시의 효력발생시기에 대해 규정한 조항이라고 본다면) 상대방에게 도달한 때 효력이 생긴다고 보는 ‘도달주의’ 또는 ‘수령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즉, 상대방이 주문서를 수령한 때 ‘주문’이라는 의사표시가 상대방에 도달한 것으로 되어 효력이 발생하게 되고 7일의 기간이 기산하게 됨) 더더욱 receipt를 ‘접수’가 아닌 ‘수령’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시 2

  

영문

Supplier shall give Purchaser 7 days prior notice of the date on and the place at which the relevant Commodities will be ready for final inspection.

번역문

공급자는 상품의 최종 검사 준비 완료일 및 장소를 7일 전까지 구매자에게 서면으로 통지하여야 한다.


잘 나가다가 ‘서면으로’라는 부분에서 걸립니다. 영어 원문에는 서면이라는 표현이 없죠. 그냥 7 days prior notice 7일 전까지 통지하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왜 문제냐고 하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드리자면,

 

그냥 ‘통지’라고 하는 경우 전화, 구두, 이메일, 메신저, 카카오톡, 문자 등 수단에 제한이 없고 어떤 방법으로든 알리기만 하면 되나, ‘서면 통지’라고 하는 경우 반드시 기록이 남는 ‘글’의 형태로 전달해야 합니다. 보통 공문, 팩스, 이메일 등이 있는데, 이메일의 경우에는 의견이 좀 갈립니다. 그래서 계약서 내 ‘통지’에 관한 조항에서 이메일이나 팩스 등도 ‘서면 통지’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명확히 규정하곤 합니다.

 

위 번역문과 같이 서면 통지로 제한하여 번역하게 되면 공급자는 날짜와 장소를 기재한 통지서를 7일 전까지 보내야 하는데, 메신저 등으로 단순 통지한 경우 구매자로 하여금 계약서에 따른 적법한 ‘서면 통지’가 없었음을 이유로 자신의 의무를 회피할 수 있도록 하는 구실을 구매자에게 부여하게 됩니다.

 

원문에는 prior notice라고만 되어 있으므로, '서면'이라는 단어를 빼고 ‘사전 통지해야 한다’라고 담백하게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아무리 서면통지가 국제적인 관행이라고 하더라도 원문에서 ‘구두통지’도 허용하고 있는 것을 번역가가 ‘서면통지’로 제한하여 “감히” 일방 당사자의 의무를 더욱 엄격하게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번역해야 할 번역가의 원문 충실 의무”에도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서면통지냐, 그냥 통지냐’하는 부분은 AI들도 자주 실수하는 게 보였었는데, 챗지피티한테는 그럴 때마다 지적했더니 그 덕분인지 이번 것은 ‘사전 통지해야 한다’라고 제대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제미니가 실수를 했습니다.

제미니: 공급인은 해당 물품이 최종 검사를 받을 준비가 되는 일시 및 장소를 구매인에게 7일 전까지 서면으로 통지하여야 한다.

제미니는 그냥 실수하게 둘 생각입니다. 얘는 내가 지적할 때마다 ‘매우 날카로운 지적이십니다!’, ‘정말 꼼꼼하시네요!’ 등으로 칭찬하면서 본인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하기는 하지만, 이제 머리가 굵었는지 웬만해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려 들지 않고 정말 논리적으로 구구절절 반박하지 않으면 설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타이핑 귀찮고 시간 아까워서 그냥 패스.

 

 

예시3


영문

If Purchaser fails to conduct inspection at such place within 7 days from the date stated in Supplier's notice, Supplier may conduct the final inspection without purchaser being present, and in such case the Purchaser shall be obligated to accept such commodities as are determined by Supplier to be in conformance with this agreement.

번역문

구매자가 공급자의 통지일로부터 7일 이내에 해당 장소에서 검사를 실시하지 아니하는 경우, 공급자는 구매자의 입회 없이 최종 검사를 실시할 수 있으며, 이 경우 구매자는 공급자가 본 계약에 적합하다고 판단한 상품을 수락하여야 한다.

 

날짜를 기산할 때 기준이 되는 시점은 정확히 번역해야 합니다. 번역문에서는 “공급자의 통지일로부터”라고 했는데, 아니죠. from the date stated in Supplier's notice는 공급자의 통지에 명시된 날짜로부터라는 뜻입니다. 공급자가 통지서에서 어느 날 몇 시에 검사 준비가 완료된다고 기재한 날짜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1월 5일에 통지서를 보냈는데(통지일), 통지서에는 2월 10일에 검사준비가 완료된다(검사준비완료일)고 적혀 있습니다. 영어 원문에 따르면 통지서에 기재된 2월 10일(검사준비완료일)로부터 7일 이내에 구매자가 검사를 실시하지 않으면 공급자는 단독으로 검사를 실시할 수 있습니다. 번역문에 따르면 통지일인 1월 5일로부터 7일 이내에 구매자가 검사를 실시하지 않으면 공급자가 검사를 실시할 수 있다는 것이 되는데, 어불성설입니다. 검사 준비가 완료되는 날은 2월 10일이라고 했잖아요.

 

올바른 번역 예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공급자의 통지에 명시된 날짜로부터 7일 이내에 구매자가 해당 장소에서 검사를 실시하지 아니하는 경우, 공급자는 구매자의 입회 없이 최종 검사를 실시할 수 있으며, 이 경우 구매자는 공급자가 본 계약에 따라 적합하다고 판단한 상품을 수락할 의무를 부담한다.



마무리


너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계약서는 정말 꼼꼼히 번역하고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원문에 있는 그대로, 원문에 최대한 충실히 번역해서 일반적인 국제 비즈니스 관행과 맞지 않는 부분도 그대로 번역해야 한다는 게 제 입장입니다. 그래야 고객님도 그 부분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다시 한번 이로움과 해로움을 모두 따져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수령이냐 접수냐, 서면 통지냐 그냥 통지냐, 통지일이냐 지정일이냐 등과 같이 어떤 단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법적 의미와 효력이 갈려 계약 당사자들의 권리와 의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경우에는 원문 소스에 있는 그대로 번역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국제 관행과 동떨어져 오타가 아닐까 의심되는 경우에는 고객님의 피드백을 받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정확히 반영하여 번역하는 게 번역자의 덕목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게 제 의견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밝히며 여기서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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